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레이트 게임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바라크자이 왕조.png]] 그레이트 게임이 본격화된 1860년의 중앙아시아 정세 [[나폴레옹 전쟁]] 이후 반(反)프랑스 동맹군의 승리를 이끈 주역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소위 ''''4대 전승국''''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프랑스를 포함한 5개국이 강대국의 반열에 있었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오늘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한동안 보호관찰 신세였지만 3년 뒤 점령군이 철수하고 [[신성 동맹#s-2.8]]에 가담하면서 강대국 지위에 공식적으로 복귀했다.] 이들 중에서도 영국과 러시아 제국이 전쟁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나폴레옹 1세]]의 패망 이후에는 영국과 러시아 제국간의 대결구도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특히 영국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유럽 대륙에서 패권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저지해 왔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의 팽창에 대응해야 했다. 러시아 제국으로서는 지리적인 이유로 해양 진출이 제한적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국방과 전쟁수행에 있어서 병력의 이동은 내선 전략에 의지해야 했다. 이 점은 유럽 대륙의 다른 강대국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러시아 제국은 국토가 워낙 광대한 데 반해 영토가 고위도에 있어 [[부동항]] 확보가 어렵고 [[라스푸티차|험난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수송에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철도]]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과 함께 공군이나 [[공수부대#s-4.4|공수군]]과 같은 신속대응 부대로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있지만 19세기의 러시아 제국에서는 병력을 재배치하는 데만 해도 몇 개월에서 심지어는 연 단위로 시간이 소요되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제국은 광대한 국토를 커버해야 하는데 해양력이 제한적이니 유사시 병력을 신속하게 재배치하거나 집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외국, 특히 영국과의 분쟁에 있어 전략적 방어자라는 부담을 가져야 했다. [[크림 전쟁]]에서는 이같은 취약점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은 러시아 남부가 직접 위협받던 위기상황에서도 곳곳에 병력의 분산 배치를 강요받았다.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근해의 발트해에도 침공 위협 때문에 300,000명이나 되는 병력이 배치되었고 동시기 카프카스에도 200,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묶여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 왕국이나 오스트리아 제국의 참전 가능성까지 대비해야 해서 폴란드 방면으로도 상당한 병력을 할애해야 했다.[* 특히 오스트리아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게 빨리 강화협상 안 하면 참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상태라 대비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앞선 곳들보다 규모는 작아서 수 천~수 만 정도이지만 국내 곳곳에 치안을 위해 병력을 주둔해야 했다. 크림 전쟁의 결과 잘나가는 국가는 일단 약화시키고 보는 유럽의 역사적인 전통을 따라 영국이 주도하여 다른 강대국과 함께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려 들면서 러시아 제국이 생각보다 몹시 취약하다는 점이 새삼스레 확인되었다. 1870년 당시에 러시아 전쟁성(국방부)은 여기저기에 고정적으로 배치해야 되는 병력을 제외하고 러시아 제국이 유럽 방면에 가용가능한 병력은 600,000명 정도로 결론지었다. 분명 적은 규모가 아니지만 같은 시기 유럽 대륙의 다른 열강들도 단독으로 그 이상의 병력을 동원 가능하다고 평가되었다. 영국이 주도하는 잠재적인 연합을 상대한다고 상정했을 때 상당히 암울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리하자면 러시아의 지리적인 특성, 즉 유라시아 대륙 북반부에 걸쳐 있는 광대한 국토는 일단 침략을 받을 때는 방어에 이점이 되었지만 동시에 방위전략을 수립할 때나 외부로 세력을 투사할 때에는 반대로 러시아에게도 족쇄로 작용했다. 크림 전쟁 이후인 19세기 중반 무렵부터는 러시아가 처한 이 지정학적 딜레마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타개책으로 제시된 것이 인도 공격이었다. 당시 러시아 지도부는 인도를 진짜 정복하기보다는 영국에 군사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유럽 방면의 부담을 해소하고 겸사겸사 중앙아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전략이었다. 즉,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군사-외교뿐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에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파탄난 경제가 전통이라 할 정도로 여러모로 맛이 간 나라였고 농업과 산업 전반 면에서 빈약한 입지에 있었지만 (비록 당시엔 제대로 개발하진 못했어도) [[석유|천연자원]]은 많았다. 하지만 러시아에는 당시 돈 잘 벌리는 물품들([[차]], [[커피]], [[담배]], [[고무]] 따위의 환금작물[[https://en.wikipedia.org/wiki/Cash_crop|Cash Crops]])에 접근할 수 있는 신대륙이나 [[동남아시아]] 쪽으로 진출할 방도가 없었다. [[발트해]]에 [[대북방전쟁|어느정도 진출하긴 하였으나]] 그 쪽 항구는 겨울이면 얼어 버리기 십상인 데다 발트해 넘어가 봐야 나오는 건 영국(...)[* 그나마 [[덴마크]]가 열심히 뜯던 발트해 관세는 짭짤한 수익을 자랑했다.]이었다. 지금이야 [[바렌츠 해]] 쪽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부동항인 [[무르만스크]]가 있지만 이곳은 지리적 위치상 신대륙이나 동남아 방면으로의 진출이 쉽지 않고 이 시기만 해도 무르만스크 일대는 거의 개발되지 않은 오지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반쯤은 있으나마나 한 땅이었다.[* 무르만스크에 철도가 부설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5년의 일이다.] 한편 [[크림 반도]]를 통해 장악한 [[흑해]]도 결국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지 못한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유럽의 환자]] 소리 듣던 퇴물 오스만 제국이지만 어쨌든 갈망의 도시를 쥐고 있는 한 보스포루스 해협을 오스만 협조 없이 러시아가 건너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다. ~~그리고 이렇게 잘 써먹던 길막용 환자는 [[윈스턴 처칠|처칠]]이 [[애진코트|군함 도둑질]]로 내던져졌다~~ ~~[[갈리폴리 상륙작전|수 만명 안작군은 덤으로]]~~] 그걸 건너도 지중해를 지나 [[지브롤터]]를 거처 [[대서양]]으로 나온다는 것도 무리였다. 심지어 지브롤터는 영국 땅이다.(...) 나온다 처도 [[신대륙]]은 어떻게 가고 [[희망봉]]은 또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수에즈 운하]]가 생긴 후엔 이야기가 좀 다르지만 그건 프랑스가 만들고 영국이 관리했다.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 반도]]로 진출해서 갈망의 도시를 점령하는 것도 방책이지만 바로 그 '''[[이스탄불|갈망의 도시]]'''를 러시아가 낼름하게 가만히 둘 [[베를린 회의|유럽 나라들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방법은 아예 [[지중해]]와 발트해, 대서양을 안 거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캅카스]] 산맥을 넘어서 페르시아로 밀고 들어가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 험준한 캅카스 산맥을 넘어서[* 옛 페르시아 속담에 "왕이 미치면 캅카스로 전쟁하러 간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어떻게 페르시아까지 갈 것이며, 가는 길에 만나는 오스만 제국은 또 어찌할 것이며, 페르시아도 더럽게 넓고 험준한데 그건 또 어떻게 다 먹을지 답이 안 나왔다. 결국 눈길은 중앙아시아로 쏠리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중앙아시아는 희대의 척박한 동네였다. 당장 [[구글 지도]]나 [[구글 어스]]만 봐도 [[카자흐스탄]]-러시아 국경 아래는 녹지를 찾아보기도 힘들고 사막이 대부분이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에 설치한 투르키스탄 총독부는 러시아령 중앙아시아를 사실상 외부로의 출구(특히 남쪽으로)가 없는 거대한 분지로 보았다. 러시아령 중앙아시아는 일부 비옥한 오아시스나 황토지대가 포함되긴 했어도 서부는 사막지대, 동부는 산악지대 그리고 소금 스텝 지대로 구성되었으며 그 바로 남쪽에는 제국의 무덤으로 악명 높은 평균 해발고도 수 천 미터의 '''아프가니스탄'''이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총독부 당국은 1914년에 관할구역의 약 1/5 정도(655,427 평방마일)만이 개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David MacKenzie, ''Turkestan's Significance to Russia (1850-1917)'', The Russian Review, Vol 22, Nr2 (1973), pp 173.] ~~헌데 그 1/5 면적이 한반도의 여섯 배도 넘는 것이 함정~~ 그래도 어찌저찌 여길 통해 남하한다면 바로 인도양에 도달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게 현대에도 별로 실현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중앙아시아 쪽은 대책 없는 황무지다. 하물며 당대 수준으로는 거길 넘어서 유의미한 통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동차는 갓 생겨난 상태라 이용하기 어려웠고, 철도를 부설하려 해도 이런 황무지에 철도 부설이 만만한 일은 아니고 설령 부설한다고 쳐도 [[증기 기관차]] 운용에 필요한 물을 구하는 것부터가 난제였다. 물론 이것은 러시아나 러시아를 상대하는 영국이나 별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지도로 얼핏 보기에는 인도행 [[고속도로]]니까.] 아니면 신장-위구르 지역을 뚫고 내려가서 [[미얀마|버마]]를 거쳐 동남아시아를 뚫고 말라카 해협에 갈 수도 있을 노릇이었다.[* 이것 또한 현대에 와서도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판명났지만 역시나 당시에는 알 게 뭐야 취급.] 한편 이런 러시아의 행보를 보는 영국은 "저 커다란 러시아 놈들이 중앙아시아 고속도로를(?) 타고 인도로 쳐들어온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아무리 당대 수준으로 중앙아시아를 유의미하게 통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곤 하지만 인도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있기는 하다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한 골칫거리다. 그리고 과연, 지금도 제대로 통행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와 맞닿은 지역은 여전히 분쟁요소로 남아 있다. 좀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지도 펼쳐다 인도 주변 땅을 모조리 러시아로 칠해 놓고 보면 좀 많이 무섭다.(...)] 당시 [[대영제국]]은 해군 규모에서 세계 최강의 열강이었으나 육군 규모에서 최강인 데다 지하자원이 많고[* 석탄, 철 같은 산업혁명의 필수자원이 풍부하다.] 땅도 넓고[* 대영제국 세력권의 절정은 아프리카 종단 정책이 완성된 1890년대 이후이며 오히려 이전에는 더 작았다.] 인구도 많은[* 현재까지 러시아가 계속 유럽 인구 1위를 차지한다. 1815년 러시아 제국의 인구는 4,200만명이었고 1907년에 이르면 인구가 '''1억 5100만명으로 1세기도 안 돼서 거의 4배 가까이 증가했다.'''] [[러시아 제국]]은 언젠가 영국의 식민지 중 핵심과 같은 인도를 위협하는 가상의 적대국으로 꼽혔다. 러시아의 영향력 확장을 영국은 전 세계 각지에서 필사적으로 방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